"약 한 거 아니야?"
어느 스포츠 선수가 특별한 경기를 했다. 그런 날에는 쉽게 볼 수 있는 기사 댓글이다. 그냥 농담 삼아 던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진지함이 묻어있는 경우도 있다. 약물은 스포츠 선수의 경기력 향상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어서 그렇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대중도 알 만큼.
e스포츠에서도 비슷한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전통 스포츠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약이라는 단어를 던진다. 약물이라고 하면 근육을 쉽게 불리는 작용만을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신체의 강함과 e스포츠의 경기력 사이에는 딱히 관련이 없으니 말이다. e스포츠 선수가 약물의 도움을 받아 경기력을 향상할 수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반인을 아직까진 만나보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로 시작한 e스포츠는 어느덧 스무 살 청년이 됐다. 짧은 역사라고 볼 수 없다. 규모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과거에는 e스포츠 선수가 연봉 1억이 넘으면 대서특필이 됐지만, 이제 억 단위를 받는 선수는 손가락으로 세기도 민망해졌다. 심지어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야구 선수와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 연봉을 받는다.
이 정도가 됐으면 갖출만한 구색은 갖춰져야 한다. 도핑 검사가 구색 중 하나다. e스포츠도 전통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공정한 경쟁이 뿌리가 되어야만 올바르게 설 수 있다. 도핑이 e스포츠 경기력 향상에 확실한 영향이 있다면, 규제는 반드시 시행돼야 하는 사안이다. 경기력에 따라 선수들이 받을 수 있는 돈의 규모가 작게는 몇억, 크게는 몇십억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됐다. 프로게이머가 언제까지 도핑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도핑은 e스포츠 선수의 경기력 향상에 영향을 미치나?

도핑이 e스포츠 선수의 경기력 향상에도 영향을 주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무슨 영향이 있겠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 맞을까 틀릴까. 궁금증을 갖고 경희대학교 재활의학과 이종하 교수를 만났다. 이종하 교수는 9년간 KBO(한국프로야구) 반도핑위원장이었고, 현재는 한국도핑방지위원회와 KBO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질문에 고민 없이 바로 답을 내렸다.
"당연히 문제가 된다"
대답은 너무나 명료했다. 이 교수는 "경기력은 종합적이지 않나. 빨리 달리고, 높이 뛰고, 무거운 것을 들게 해주는 것만을 경기력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집중력, 피로감 등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사항은 다양하다"고 설명하며, "현재 금지된 약물 대부분이 e스포츠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단언했다.
대중들에게는 약물이 신체 강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꼭 그렇진 않다는 거다. 오히려 약물은 선수의 피로도를 줄여주고, 집중력을 향상하는 데 중점이 돼 있었다. 특히, 집중력과 피로도에 밀접한 상관이 있는 흥분제 계통의 금지 약물은 e스포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이야기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e스포츠 선수가 흥분제를 사용해 문제가 된 사례가 있었다. 2015년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 프로게이머인 코리 프리슨(셈피스)이 "대회에 나올 때 팀 동료들과 '애더럴'을 복용한다"고 밝혀 파장을 일으켰다. 최근에도 사건이 있었다. 오버워치 리그 선수인 '타이무'가 개인 방송에서 리그 내 20명 이상이 애더럴을 복용했다고 폭로했다. 사실 여부가 드러나진 않았으나 논란이 됐다.
이 교수는 애더럴이라는 단어를 듣자 익숙하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외국 용병들이 많이 사용했던 약물이다. 굉장히 유명하다. 집중력을 향상해주고, 불안감을 억제해준다"며 "e스포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만한 약물"이라고 콕 짚었다.
원하면 구할 수 있는 걸까?
만약에 금지 약물 사용하고자 마음을 먹은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는 쉽게 약물을 구할 수 있는 걸까? 이 교수의 대답은 이번에도 간단했다.
"구하려면 구할 수 있다"
주변에 의료계와 관련된 지인이 있다면, 금지 약물을 획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또한 온라인을 통해 조금만 어두운 경로를 밟는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획득이 어렵지 않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모르고 도핑을 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문제다. 한약은 물론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양약이나 보충제에도 금지 약물 성분이 들어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한국인들이 간혹 먹는 보약인 뱀탕이나 개소주도 안전하지 않다. 생약 성분이 들어있는 모든 약은 피해야 한다. 생약은 천연으로 산출되는 자연물을 그대로 또는 간단한 가공처리를 하여 만든 의약품이나 의약품 원료를 뜻한다.
실수로 약물을 복용할 수 있기 때문에, 스포츠 선수들은 작은 것 하나를 섭취해도 성분을 모두 따져본다. 이 교수는 "KBO 선수들이 모르고 약물을 사용하는 일은 이제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특별한 자문 기관이 없고, 도핑 검사를 하지 않는 e스포츠라면 선수들이 쉽게 노출될 수 있다"고 염려했다.
금지 약물은 스포츠의 공정성만 해치는 게 아니다
금지 약물이 스포츠계에서 해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스포츠의 공정성 위배만이 아니다. 금지 약물은
중독성이 있다. 약 자체에 습관성과 중독성이 있고, 약을 먹고 성적이 오르면 계속 찾을 수밖에 없다. 약을 끊었을 시 성적이 떨어진다는 불안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실수든 고의든, 한 번 약에서 힘을 얻으면 다시 찾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지적했다.
금지 약물 중독은 위험하다. 금지 약물을 장기간 지속적으로 복용하게 되면
인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한다. 약물 종류에 따라 부작용이 다양한데,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대부분 종착지가 생명이라는 거다. 금지 약물 부작용은 생명의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큰 위험을 불러온다. 특히, 심장 마비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경각심이 필요한 때
e스포츠 선수들은 약물에 쉽게 노출될 수 있고, 그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에도 무방비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도핑에 대한 경각심이 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라이엇 관계자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도핑 방지 및 검사와 관련된 제도를 준비하지 못했다. 아직까진 앞으로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라이엇만의 문제가 아니다. 블리자드도 마찬가지였고, e스포츠 관계자 모두 도핑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직 국제e스포츠연맹이 주관하는 대회, 아시안게임, ESL 같은 중소 규모의 국제 대회에서만 도핑을 규제하고 있다. e스포츠 대회의 핵심인 게임사에서 주관하는 리그는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 '타이무'가 쉽게 선수들의 애더럴 복용 사실을 폭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우리나라 e스포츠 선수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실수로 도핑을 할 수 있고, 혹시나 도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안을 수도 있다. 최악으로는 e스포츠가 20년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 위험성에 e스포츠를 지켜야 하고 e스포츠 선수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e스포츠는 도핑을 막을 그물망이 전혀 없다.

먼저 정기적으로 도핑 방지 교육을 해야 한다. 한국 e스포츠 협회는 시즌이 시작되기 전 선수들을 위해 매번 소양 교육을 실시한다. 교육 시간 중에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실효성이 없는 수업도 있다. 그러기보다는 알맹이가 있는 도핑 방지 수업을 하는 게 어떨지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는 도핑 방지와 검사가 필수가 돼야겠지만, 일단은 도핑에 대해 배우는 것만으로도 응급 처치가 될 수 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금지 약물과 성분을 검색할 수 있게 돕고 있다. 한약이나 양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고 있는 선수가 있다면, 혹시나 금지 약물 성분이 들어있지 않은 지 도움을 받길 바란다. 고육책이지만, 한순간에 '약쟁이'라는 오명으로 뒤집어쓰고 명예를 실추하지 않도록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당장 대회에서 도핑과 관련한 명확한 규칙이나 규제가 없다고 해도, 도핑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대명제를 위반하는 일이다.
이제부터 하나씩 실질적인 규칙과 제도를 만들고 정비해야 한다. 한국에는 한국도핑방지위원회라는 도핑을 방지하고 검사하는 기구가 있다. KBO는 자체적으로 도핑방지기구를 운영하다가 2016년부터 한국도핑방지위원회에 업무를 이관한 바 있다. e스포츠 또한 한국도핑방지위원회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도핑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면 소를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도핑 방지를 향한 첫걸음을 떼야 한다.
심영보, 남기백(사진) 기자(
Roxyy@inven.co.kr)
기사원문
https://sports.news.naver.com/esports/news/read.nhn?oid=502&aid=0000000272&viewType=COLU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