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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스포츠재단 소식] '2.7g' 탁구공에 담겨 2,624km를 날아간 진심

작성자
ISF
작성일
2017-10-10 15:48
제목: [엠스플 기획] '2.7g' 탁구공에 담겨 2,624km를 날아간 진심
매체: 엠스플뉴스 /  강윤기,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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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탁구 대표팀 선수들이 대표팀 유니폼에 적은 응원 사인. 유승민 IOC 선수위원흔 한국 탁구계의 진심을 투병 중인 필리핀 탁구 유망주에게 전달했다(사진=엠스플뉴스 강윤기 기자)




[엠스플뉴스]


“휴-.”

추석 연휴를 맞아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인천공항. 유승민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날 유 위원은 필리핀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깜박하고 여권을 사무실에 두고 왔어요. 사무실 가서 여권 찾고 왔더니 출국 시간이 다 돼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유 위원의 이마에서 연방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기자가 의아했던 건 다음이었다. 공항에 도착한 유 위원은 땀을 닦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뭔가를 열심히 포장하기 시작했다.

‘대한탁구협회 기증’이라고 쓰인 커다란 박스 안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것일까. 그보다 유 위원은 어째서 추석 연휴 기간에 한국에서 2,624km나 떨어진 필리핀에 가는 것일까. 혹시 연휴에 필리핀으로 여행이라도 떠나는 건 아닐까.

“여행이요? IOC 위원이 되고서 개인적인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해요. '필리핀 탁구 선수' 이안 라리바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라리바 선수가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에요. 그 소식을 듣고서 대한탁구협회와 탁구 대표팀 선수들이 선물과 성금을 준비했습니다. 그걸 제가 대신 전달하러 필리핀으로 가는 겁니다.”


급성 백혈병으로 쓰러진 필리핀 ‘탁구 유망주’과 함께 한 한국 탁구





필리핀 탁구 대표팀 권미숙 감독(사진 왼쪽부터)과 이안 라리바(사진=엠스플뉴스)



1994년생인 이안 라리바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필리핀 선수단 기수를 맡은 전도유망한 탁구선수다. 특히나 한국과 인연이 깊은 선수다.

인연은 1989년 독일 도르트문트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은메달의 주인공인 권미숙 덕분에 맺어졌다. 권미숙은 2014년 2월부터 필리핀 탁구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때 ‘필리핀 탁구 유망주’ 라리바를 만났다. 권 감독은 열과 성을 다해 라리바를 지도했다.

권 감독의 지도로 라리바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발전했다. 발전된 실력으로 라리바는 필리핀 탁구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티켓을 거머쥔 선수가 됐고, 일약 세계 탁구계가 주목하는 신성(新星)으로 우뚝 섰다.

‘꽃길’을 걷던 라리바의 운명이 바뀐 건 2017년 1월부터였다.

“건강했던 라리바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단순 감기인 줄 알았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체중까지 주는 거에요. 그래 병원에 갔죠. 병원에 갔더니….”

병원까지 라리바와 동행한 권 감독은 의료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라리바에게 ‘급성 백혈병’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라리바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얘길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필리핀 여자 선수 가운데 제 지도를 가장 잘 따라준 선수가 라리바에요. 무엇보다 제 딸과 같은 선수라….” 권 감독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온다.

그렇다고 권 감독이 가슴만 아파한 건 아니다. 라리바의 어려운 가정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던 권 감독은 필리핀 한인협회와 대한탁구협회 그리고 국제탁구연맹(ITFF)에 도움을 요청했다.

ITFF는 적극적으로 모금에 나섰다. 대한탁구협회도 라리바를 도와달라는 권 감독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탁구선수 출신인 유승민 IOC 선수위원 역시 자발적으로 라리바 돕기에 나섰다. ‘필리핀 탁구 유망주’를 살리기 위해 세계 탁구계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국 탁구인의 마음을 담아 필리핀에 다녀온 유승민 IOC 선수위원





필리핀 병원에 찾아가 투병 중인 라리바의 쾌유를 기원하는 유승민 IOC 선수위원(사진=유승민)



한국 남자·여자 탁구 대표 선수들로부터 전달받은 모금액을 환전한 유 위원은 봉투에 정성스럽게 돈을 담아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전 IOC 선수위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 전세계 선수들의 권익 수호와 복지증진이에요. IOC 선수위원으로서 라리바 선수를 직접 만나 격려할 생각입니다. 사실 라리바처럼 갑자기 건강을 잃는 선수가 많아요. 여건만 된다면 제 힘이 되는 만큼 그 선수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라리바를 위해 흔쾌히 성금을 모아준 한국 탁구 대표팀 선수들이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대한탁구협회는 라리바를 위해 500만 원 상당의 탁구공을 준비했다. 한국 탁구대표팀은 성금 500만 원을 모았다. 한국 남자 탁구대표팀 김택수 감독은 “라리바 선수가 다시 건강하게 탁구채를 잡길 빈다. 우리 선수단 모두 라리바가 빨리 완쾌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말을 유 위원 편으로 들려줬다.

유 위원은 추석 연휴 기간 필리핀에서 라리바를 만나 한국 탁구계의 격려와 응원을 전달했다.

“가기 전엔 걱정이 많았어요. 하지만, 정작 라리바 선수를 보니까 표정이 무척 밝더군요. 라리바 선수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가 짧아졌다'고 속상해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나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뛸 때 머리가 짧았습니다. 하지만, 그 무대에서 올림픽을 땄습니다‘고요(웃음). ’지금 머리 스타일이 더 예뻐 보인다‘고 하니까 활짝 웃더군요.”

스포츠 외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국경을 넘어 서로의 진심을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 외교다. 한국 탁구계와 유 위원이 그걸 보여줬다. ‘IOC 위원’이란 감투와 권력을 자신의 안위나 처세에 이용하지 않고, IOC 위원 본연의 임무에만 집중하는 유 위원을 많은 스포츠 행정가가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윤기, 박동희 기자 stylekoon@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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